01. 논농사의 시작

우선 일만삼천년된 쌀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쌀 농사가 얼마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 왔는지 살펴보자. 몇 년 전 경기도 고양군 일산의 가와 리에서 숯검정이 된 쌀겨를 발견했는데 방사선 동위원소 방법에 의해 연대를 추정결과 5000여년전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다가 1998년에는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습지의 이탄토층에서 열한 톨의 벼 알갱이를 발견하였는데, 그들의 DNA를 분석한 결과 이 벼 알갱이들은 13,000여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전 세계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오래된 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며, 한반도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쌀 농사를 시작하였다는 여러 가지 과학적 증거들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02. 수령칠사와 중농정책

삼한시대부터 조선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왕조들은 농업을 국가 성립의 근본으로 삼았다.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와 조선조 등의 역대 왕들은 농업의 진작과 농경지의 확장 그리고 세수의 확대에 온힘을 쏟았다. 예로서 조선조의 중농정책은 관리들의 인사제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정기인사는 새 임지에서의 권농업무를 감안하여 근무지로 부임하는 시기가 춘분 전 50일 미만에 해당되는 자만 전임시켰다. 그래야만 그 해의 영농 준비를 봄부터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령은 고을의 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막중한 위치이지만, 수령칠사(守令七事) 즉, 수령이 해야할 일곱 가지의 일로서 농업을 번창하게 하는 일, 인구를 증가시키는 일, 교육을 흥하게 하는 일, 군대를 잘 정비하는 일, 부역을 균등하게 시키는 일, 재판을 공평하게 하는 일, 사회 정화를 시키는 일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업무가 수시로 수령에게 떨어졌다. 농업을 번창하게 하는 일은 수령칠사의 최우선 과제로서 당시에도 쌀의 소출을 올리는 결정적 단서는 물의 자유로운 이용과 조정에 있음을 알고 곳곳에 저수지나 보 등 수원공을 축조하고 이를 유지 관리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그러나 낯선 타관에서 고을의 향리의 농간을 극복하여 1800일의 의무복무 기간을 무난히 넘긴다는 것이 어려워 핑계나 청탁을 통해 가급적 수령직을 단기간 내에 끝내려는 경향마저 생겨났다. 하지만 대부분 지방수령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중앙 부서에서 4품이상의 고위직에 임명되기 위해서는 지방수령직을 반드시 거치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농업이나 일선사정을 모르면 나라 경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하니 당시 농업이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케하는 합리적 제도가 아닐 수 없다.

03. 토지제도와 농지의 단위

우리나라 역사를 통하여 새로운 왕조의 탄생은 항시 토지제도와 농업의 정비를 동반하였다. 삼국시대는 물론 통일신라와 고려조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우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전 왕조에서 문란했던 토지의 소유와 세제를 혁신하여 농정을 쇄신코자 하였다. 조선조는 개국하자마자 전국의 토지를 일단「공전」으로 편입하였다. 여기서 「공전」이란 경작농민이 국가에 세와 역을 납부하는 토지이며, 이에 대하여「사전」이란 세(稅)와 역(役)의 수취권이 관료나 귀족에게 위임 또는 지급된 토지를 말한다. 따라서「공?사전」의 구분은 소유권의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취권의 귀속처가 공인가 사인가에 의해서 구분되었다.

「공전」은 그 일부를 왕족이나 공신 및 관료들에게 관청의 직급과 신분에 따라 18단계(당시에는 이 계층의 단위를 「과」(科)로 부름)로 나누어 제일 높은 직급의 150결을 시작으로 각 단계별로 차등화 하여 지급하였다. 이와 같이 지급된 토지는 일종의 「사전」으로 「과전」이라 부르고 이 같은 제도를 「과전법」이라 하였다. 이 「과전법」에서는 실시 대상지를 경기도에 국한시켰고, 「수신전」 (守信田: 과전을 받은 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그의 처가 수절하면 그 과전을 전부(자식이 있을 때) 또는 그 반(자식 없이 수절 할 때)을 승계 하는 것),「휼양전」(恤養田: 부모 모두가 사망하면 어린 자식들이 돌아가신 부모의 과전을 전부 이어 받는 것),「공신전」 (功臣田: 공신이 되어 받은 과전),「사전」(賜田: 하사 받은 「과전」) 등 당초부터 일부 세습을 인정하였으며, 수급자는 1 결 (結: 농지의 단위)당 2두(斗: 곡물 체적의 단위)의 토지세를 국가에 납부하였다.

그러나「과전법」은 시일이 지남에 따라 지급대상자가 늘어 1417년부터 충청, 전라, 경상도 등지로 확대되었으며, 1466년(세조 12년) 「과전법」을 폐지하고 새로이「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게 되었다. 「직전법」에서는 종래 일부 세습화하던「과전법」을 폐지하고 현직 관리에게만 직전을 지급하였다. 그러나 지급하는 면적이 최고 110결로 전보다 줄었고 퇴직 또는 사망 후의 보장이 없어지자, 재직하는 관리들의 착취가 더욱 심해졌다.

「결」(結)「부」(負)제는 조선조 토지제도의 근간이 되는 전통적 농지단위였다. 이는 수확량과 토지의 면적 및 과세를 연결 파악하는 단위로서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초 벼 한 줌을 1「파」(把)라 하여 수확량의 단위로 삼아 10「파」를 1「속」(束), 10「속」을 1「부(負)」, 100「부」를 1「결」(結)로 하였으나 차츰 토지의 단위로 바뀐 것이다. 1443년에는 농지등급을 농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은 달라도 같은 수량을 올리는 면적을 산출하여 적용하였다. 곧 1등 전에 비하여 2등 전의 면적은 더 넓고 3등 전은 더욱 넓어, 6등 전 1결은 1등 전 1결의 4배 가까운 넓이가 된다. 곧 6등 전의 수확량을 1등 전과 같게 하려면 4배 이상의 면적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는 실 면적은 달라도 1결당 수확량과 조세는 동일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여러 가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당시의 농지제도 발상 자체가 변하기 쉬운 농지의 비옥도나 이에 따른 수량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수화하고, 반대로 절대로 변하기 어려운 토지 면적을 변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모순을 가지고 있다.

04. 조세부과 방법

조선전기의 조세부과방법에는 「전품연분법」이 있었다. 가장 풍년이 든 해를 상상년(上上年)으로 하여 작황비에 따라 상상년의 90% 작황은 상중년, 80%는 상하년, 70%는 중상년,... 등으로 구분하여 상상년은 농지 1결당 20두를 과세하고 상중년은 18두 등으로 하여 작황비가 상상년의 10%이하이면 면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세방법은 강원도 및 황해도이남 지방에 적용되고 농업기술이 낙후된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는 다시 3분의 1을 감하며, 더욱 낙후된 제주도는 2분의 1을 감하여 적용하였다.

풍흉(豊凶)의 정도는 음력 8월 15일 이전 권농관이 예상작황을 지방수령에게 보고하고, 지방수령은 이를 토대로 현지확인 후 9월 15일까지 차 상급 기관장에게 보고하며, 이를 다시 검토하여 중앙정부 기관인 의정부에 보고하면, 관련 부서가 협의하여 과세하였다. 1결당 20두의 조세부과를 최근의 단위로 환산해 보면 10a당 약 176kg이 된다. 이는 최근 수확량 470kg/10a 내외의 약 37.5%수준으로, 과연 15세기에 이만큼의 생산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가며 조세 부담이 너무 과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농민부담이 조세로 곡물을 바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각종 명목으로 도량형기, 특히 체적을 재는 기구인 「말」을 표준보다 더 크게 만들어 받거나, 됫박에 곡물이 높이 쌓이도록 하여 받기도 했고, 수납 시에는 지주나 관리가 지정하는 곳까지 세금으로 낼 곡물을 운반하여야 했다. 여기에 더하여 말먹이용 짚단 10속을 납부하거나 이를 쌀로 환산하여 세금에 가산하고, 쑥, 숯, 섶, 꼴 등 제반 잡물도 현물이나 쌀로 환산하여 가산되었다. 이 밖에도 국가에서는 지방의 특산물도 거두었다. 이와 같은 조세나 공물 이외에 경작자들에게는 국가의 과중한 부역이 있었다. 즉, 농지 8결당 한 해에 한 사람이 6일 이내의 부역을 부담하고, 만일 길이 멀어 6일 이상이 소요될 때는 해당 일을 다음해의 부역에서 감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재정 운영의 편의를 위해 1635년(인조 13년)에 풍흉에 상관없이 토지의 비척에 따라 일정 세율을 적용하는 영정법(永定法)을 제정하였다. 전분을 9등으로 분류하여 지역특성에 따라 세율을 다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흉년과 같이 수확이 감소할 때에도 미리 고정된 세율을 적용하였으므로 불합리한 과세를 피하여 농지를 이탈하는 농민이 늘어, 결과적으로 세입은 감소되어 갔다. 이에 1608년(광해군 즉위년) 새로이 대동법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는데, 전지역에 정착되기까지 100여 년이 걸린 데다가 공물은 필요에 따라 여전히 징수되어 농민에 대한 실질적 혜택은 없었다. 그러나 세원을 토지수익으로 단일화하였고 금납화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대동법은 한국 조세제도사상 획기적 발전계기를 이룬 혁신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05. 수리시설

조선시대의 대표적 관개시설인「제언」은 산간 협곡에 제방을 구축하여 물을 저장토록 한 시설을 말하며, 오늘날의 댐 또는 저수지와 같은 기능의 시설이다. 때로는 평지의 약간 높은 곳을 파서 건설한 경우도 있었으나 흔한 방법은 아니었다. 당시의 시공기술은 오늘날과 같이 발달되지 못하여, 저수지가 파괴되어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자두 나타난다. 당시 저수지의 취수장치는 오늘날의 것과 거의 다름이 없는데 제방 밑으로 물을 빼는 제방 안쪽의 바닥에 제방 밖으로 통하는 돌로 만든 수로는 현대식 저수지의 복통(伏桶;)에 해당되며, 복통과 연결되어 수위별로 구멍을 뚫은 나무통(木桶)은 오늘날의 사통(斜桶;)과 같은 것이다.

현재와 다른 점은 사통이 제방의 경사도와 같이 비스듬히 제방에 기대는데 대하여 당시의 목통은 제방에 기대지 않고 제방 안의 밑바닥, 곧 돌 수로와 연결되는 지점에 독립적으로 서 있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만수위가 되어 물을 빼는 3~5개의 구멍을 조작할 경우 불편하게 되는 점이 현재와 다르다. 오늘날의 물넘이에 해당되는 「무넘이」도 구축되어 있어 원리 면에서는 현재의 설계구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천을 가로막아 수위를 상승시켜 취수하는 시설인「보」(洑)는 관개용수를 취수하기 위하여 많이 이용되었다. 건설된「보」는 이것을 이용하는 농민들끼리「수리계」(修理契),「보계」(洑契) 등의 이익단체를 조직하여 보를 개, 보수하거나 관리, 운영하였다.「보」는 위치에 따라 크고 작은 여러 규모의 것이 있으나, 산간의 골짜기를 막은 것은 비교적 작고 평야부의 것은 규모가 비교적 컸다. 보의 시공은 물 흐름이 빠른 곳에 먼저 한 줄로 목책을 세우고 물이 저류 되는 쪽에 흙과 떼 그리고 돌로 다져가며 쌓았다. 이렇게 쌓은 물막이와 함께 물을 빼어 가는 큰 수로를 설치하였고, 이 수로를 중간에 막아 작은 수로로 물을 대어 논으로 물을 보냈다.「보」는 봄 가뭄이 들면 물을 사용하기 위해 매년 고정된 위치에 구축하는 것으로, 우기가 되면 홍수를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유실되고 다음해 봄에 다시 시공하는 게 보통이었다. 보통 농민을 동원하여 「보」를 건설하였는데 큰 것은 수백 인, 중간 크기는 수십 인, 작은 것도 십여 인이 필요하였다. 여러 날 걸려 겨우 만든 당시의「보」는 홍수가 나면 바로 무너져버려 농민들의 수고가 매우 컸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보」는 강우강도가 조금만 세면 곧 파괴되어 버리고 말 것임을 전제로 막은 것이다. 만일 보가 터져 나가지 않는다면 인근의 전답을 침수시키거나 양쪽의 제방을 유실시켜 큰 손실을 보기 때문이었다.

수리시설의 관리기관

수리시설의 관리기관 1481년(성종 대)에「제언사」(堤堰司)라는 관청 이름이 기록에 등장한다. 「제언사」는 정규 조직편제에 들지 않는 관청으로서, 신축 수리시설의 허가나 폐기에 대한 처리, 수리시설의 파괴 또는 불법 경작 적발을 위한 「제언경차관」의 파견업무 등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언사」의「제조」가 지방을 순회할 때는「제언순찰사」라 불렀으며, 지방의 수리시설과 그 관리를 점검하고 지방관리의 근무 상태를 조사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고 한다. 그 후「제언사」는 필요에 따라 설치, 폐지, 부활되기도 하였으나 소속은 「호조」(戶曹)이었다. 그러다가 1683년(숙종 9년)에는 힘이 있는 부서인「비변사」(備邊司: 국경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는 부서)로 소속이 바뀌면서 「비변사」의 고급 관리 한 사람이「제언사」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리행정을 전담하였다. 그 후 1744년의 편제는 관리 책임을「의정부」의 삼정승이 직접 겸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농업행정기구를 의정부 삼정승이 겸임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06. 모경과 농민항쟁

1600년대 초반(선조 대와 인조 대)은 「왜란」(倭亂: 1592~1598에 일어난 일본군의 침략)과 「호란」(胡亂: 1627, 1636에 발생한 청국군의 침략) 등 외세의 침략으로 전국이 파탄에 빠져, 농토는 황폐하고 백성은 유랑민화 되어 갔으며 저수지들도 폐허로 변했던 수난의 시기였다. 저수지의 저수부지에서는 주인 몰래 남의 땅에 농사를 짓는 모경(冒耕)이 크게 성행하였고 수리시설은 거의 파괴되어 권농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893년 「합덕」고을에 거주했던 전직 전라도 향토 방위군사령관 이었던 이정규(李廷珪)가 수리계의 장이 된 것을 기화로 방죽의 얕은 부분을 개간하여 논을 만들어 사유화하였는가 하면, 관개지역 부락민에게 새로이 수세를 부과하여 징수하려 했을 뿐 아니라, 양반의 신분을 내세워 일반 백성들에 대해 갖가지 착취를 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이 드디어 집단행동으로 그를 축출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소위「합덕 민란」이었다.

이 「합덕 민란」이 일어난 두 달 후에「고부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만석보」는 전북 「고부」군(현 정읍군)의 동진강을 가로막아 만든 관개용 보로서 이평평야의 관개수원으로 축조된 것이었다. 이평평야의 관개수원으로는 상류 지역에 본래 농민들이 설치한 보가 있었으나, 1893년(고종 30년) 고부군수가 하류에 농민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만석보」를 건설하자 농민들이 이에 항거하면서 봉기하여 보를 파괴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고부농민항쟁」이다. 이 항쟁은 양반사회에 항거하는 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07. 한국 저수지의 원조 벽골제

기록상 최초로 나타나는 한국 저수지의 원조는 서기 330년에 축조된 벽골제이다. 지금으로부터 1700여년 전에 축조된 이 저수지는 지금도 그 흔적이 전북 김제에 남아 있다. 김제에 있는 농업박물관에 가면 당시 이 저수지에 축조되었던 수문의 유물들을 모아 그 모습을 재생시킨 것을 볼 수 있다. 학자들이 인정하는 기록상의 저수지로는 최고의 것으로 가히 한국 저수지 계보의 가장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벽골제에 대한 기록을 보면 벽골제 축제 당시의 제당 길이는 3,250m, 제당의 단면형상은 사다리꼴로서 밑변이 21m, 제정폭이 10m, 높이가 5.7m 이었으며, 저수용량은 248,625 ㎥, 만수면적은 37㎢, 그리고 수혜면적 10,000 ha로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중소규모의 것이나, 당시로서는 이 저수지의 축조가 국가적 대역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벽골제에는 원래 5개의 수문이 있었는데 중앙에 위치한 3개의 수문은 물을 취수하기 위한 취수문이었고, 남과 북에 있는 두 개 수문은 홍수시 홍수를 방류하기 위한 여수토의 기능을 당당한다고 하였다.

08. 농업수리사를 통한 교훈

농업은 우리나라 역대 왕조를 지탱하여주는 근본이었다. 왕을 위시한 중앙정부와 지방 관청의 주요업무 가운데 농업과 이것을 위한 수리시설의 관리가 매우 중요하였다. 또한 역대왕조의 흥망성쇠는 토지제도의 합리성과 제도운영의 양부와 궤를 같이 하였다. 왕조가 성립되면 제일 먼저 토지제도를 정비하였고, 세월이 흘러 토지제도가 문란해지면 그 왕조는 망하고 말았다. 농촌문화의 기반인 공동체, 두레정신은 바로 수리시설의 건설과 관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하기도 한다. 옛것을 돌이켜 반성하면 장래를 대비할 수 있다는 묵시적인 뜻이 담긴 말일 것이다. 오늘날 농업이 차지하는 산업으로서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고, 농촌의 전통문화는 점점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입맛까지 변하여 이제는 쌀 소비량이 줄기 시작하고 있다고 한다. 급기야 쌀 풍년을 걱정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농부들의 격앙가가 그리운 시대는 이미 가버린 것인가.

농업과 농업수리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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